4화. 취향을 기억하다
2026. 7. 15. · 👁 8
#1 이름을 알게 된 뒤로, 서연의 하루는 조금씩 달라졌다. 오후 세 시가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원두를 확인하고, 물 온도를 맞추고, 컵을 미리 데워두는 습관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과정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지훈 씨가 오는 시간. 지훈 씨가 마시는 커피. 그냥 '3시 손님'이었을 때와는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지훈은 여느 때처럼 오후 세 시에 카페를 찾았고, 서연과의 대화도 조금씩 늘어갔다. 처음엔 짧은 인사 정도였던 것이, 이제는 날씨 이야기나 요즘 읽는 책 이야기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 작은 변화들이 쌓여가는 걸 서연은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언니, 오늘도 미리 컵 데워놨네." 민아가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 습관이야." "습관은 무슨. 이제 이름까지 알았으면서 뭘 숨겨." 서연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부정할 마음도 딱히 없었다. 이제는 스스로도 이 마음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언니가 이렇게 누구한테 신경 쓰는 거 처음 봐." "내가 뭘 그렇게 신경 쓴다고 그래." "매번 원두 갈 때마다 시계 보잖아. 3시 다 됐나 안 됐나." 정곡을 찔린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괜히 카운터를 정리하는 척했다. 오후 세 시, 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연은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커피 내릴 준비를 마쳐두었다. 원두를 갈고, 물을 내리고, 시럽 없이 깔끔하게. 지훈이 카운터로 다가와 주문을 하려는 순간, 서연이 먼저 컵을 내밀었다.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맞으시죠?" 지훈이 살짝 놀란 얼굴로 컵과 서연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벌써 준비하셨어요?" 서연은 순간 조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늘 지켜보던 것을 이렇게 티 나게 보여준 건 처음이었다. 손님을 놀라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예상보다 큰 반응에 오히려 서연이 더 당황스러웠다. "어제부터 미리 준비하려고 마음먹었거든요. 매번 기다리시는 것도 죄송해서요." #2 "매일 같은 걸로 드시니까, 이제 외워버렸어요." 서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사실 그 말 속에는 수많은 오후 세 시가 쌓여 있었다. 매번 눈여겨보고, 기억하고, 조금 더 맛있게 내려주고 싶었던 마음들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매번 주문하는 것도 은근히 귀찮은 일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준비해주시니까 뭔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네요." 지훈의 말에 서연은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걸 느꼈다. "특별할 것까지야. 그냥 단골손님 서비스예요." "단골손님 서비스치고는 너무 완벽한데요. 물 온도까지 딱 맞는 것 같아요." 지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하나에 서연은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사실 처음엔 그냥 단골손님이라 기억한 거였는데, 요즘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서연은 무심코 그 말을 뱉고는 스스로 흠칫 놀랐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른 다른 말을 덧붙이려 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다른데요?" 지훈이 짓궂은 표정 없이, 오히려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 질문에 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카운터 위로 흐르는 짧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가 이내 서연이 먼저 눈을 피했다. "그냥… 신경 쓰인다는 뜻이에요." 작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지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서연은 괜히 카운터의 행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은 작업 잘 되세요?" "덕분에요. 사실 어제 막힌 부분이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풀렸어요." "다행이네요.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한데, 여쭤봐도 실례일까요?" 지훈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아직은 비밀로 하고 싶어요. 완성되면 제일 먼저 보여드릴게요." 그 말에 서연은 순간 심장이 살짝 뛰었다. '제일 먼저'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약속이에요.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예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새끼손가락을 내밀 듯한 몸짓을 하자, 지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요. 서연 씨가 첫 독자가 되는 거예요." "영광인데요? 그럼 저도 뭔가 응원할 게 있어야겠네요. 오늘부터 커피 한 잔에 응원 한 스푼씩 추가해드릴게요." "그거 좋은데요. 그럼 오늘 커피는 유독 맛있겠네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짧게 웃었다. 별것 아닌 농담이었지만, 그 순간의 공기는 평소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3 지훈이 늘 앉는 창가 자리로 돌아가고, 서연은 카운터에서 다음 손님을 준비하면서도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완성되면 제일 먼저 보여주겠다는 말. 별생각 없이 던진 인사치레일 수도 있었지만, 서연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신경 쓰인다"는 말을 뱉어버린 것도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손님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켠이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언니, 방금 표정 봤어? 완전 심쿵한 얼굴이던데." 민아가 옆에서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툭 쳤다. "아니거든." "거짓말. 아까부터 입꼬리 실룩거리는 거 다 보이거든." 서연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민아의 놀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감정을 누군가에게 들켜도 괜찮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한 시간 남짓, 지훈은 노트북을 펼쳐두고 조용히 작업에 몰두했다. 가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 타이핑하는 손끝의 리듬. 서연은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손님을 응대하고 커피를 내리는 와중에도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네 시가 넘어 지훈이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잘 마셨습니다. 그리고… 신경 써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해요." "아니에요, 내일도 준비해둘게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서연은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한 약속처럼 말이 나왔다는 게. "기대할게요." 지훈이 웃으며 문을 나섰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시작된 작은 습관 하나가, 어느새 두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감을 준비하며 서연은 문득 생각했다. 손님의 취향을 외우는 건 바리스타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지훈의 커피를 준비할 때만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는,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게 문을 잠그고 집으로 향하는 길, 서연은 오늘 지훈과 나눈 대화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첫 독자가 되어달라는 말, 응원 한 스푼을 넣어주겠다던 자신의 농담,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웃던 지훈의 얼굴. 별것 아닌 하루였는데도, 마음속에는 작은 설렘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누운 뒤에도, 서연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내일은 또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지훈이 쓰고 있다는 소설은 어떤 이야기일까. 완성되면 정말 자신에게 제일 먼저 보여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속에서, 서연은 스스로도 낯선 기분에 조금 웃음이 났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궁금해한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서연은 낮에 자신이 뱉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신경 쓰인다는 말.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앞으로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서연은, 그 사실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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