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름을 알게 되다
2026. 7. 14. · 👁 10
#1 다음 날 하늘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았다. 서연은 아침부터 괜히 창밖을 살피며 오후 세 시를 기다렸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우산을 돌려받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는 걸까. 출근길 내내 서연은 어제 나눈 짧은 대화를 곱씹었다. 우산을 건넬 때 스치던 손끝의 감각, 젖은 소매를 털던 낯선 모습. 별것 아닌 장면들인데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카페에 도착해 앞치마를 두르면서도, 서연은 오늘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언니, 오늘따라 시계를 몇 번째 보는 거야?" 민아가 원두를 채우다 말고 웃으며 물었다. "그냥… 시간 확인한 거야." "어제 그 우산남 오늘 우산 돌려주러 온다고 했지?" 서연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하며 카운터를 정리했다. 부정할수록 더 티가 난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감추는 게 습관처럼 남아 있었다. "우산 돌려받는 게 뭐 대수라고. 근데 언니 표정 보면 진짜 소풍 가는 애 같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연은 자꾸만 손목시계로 시선이 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오후 두 시 오십 분쯤, 서연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창가 자리를 정리했다. 딱히 손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를 한 번 더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유리창을 닦으며 문 쪽을 흘끗거리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세 시 정각,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남자가 들어섰다. 손에는 어제 빌려준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종이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제 우산, 정말 감사했습니다." 남자가 우산을 카운터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2 "별말씀을요. 그냥 매장 우산인데요, 뭘." 서연이 웃으며 우산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남자가 종이 봉투를 슬쩍 내밀었다. "이거… 작은 감사 표시예요.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서연은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근처 베이커리의 쿠키 세트가 들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덕분에 감기도 안 걸리고 무사히 넘어갔어요. 사실 어제 그 비를 맞고 집에 갔으면 큰일 날 뻔했거든요."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서연은 그 웃음에 덩달아 웃음이 났다. "근처 베이커리 쿠키를 아세요? 저도 가끔 가는 곳인데." "아, 여기 오는 길에 있길래 몇 번 들렀었어요. 크루아상이 특히 맛있더라고요." "저도 거기 크루아상 좋아해요. 아침에 종종 사 먹어요." 사소한 취향 하나가 겹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화는 한결 편안하게 이어졌다. 서연은 카운터 너머로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스스로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저, 그런데… 계속 손님이라고만 부르기도 뭐하고.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용기를 내어 물은 질문이었다. 손님의 이름을 묻는 게 이렇게 떨리는 일인 줄, 서연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손끝이 살짝 차가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이번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지훈이라고 합니다. 이지훈이요." "지훈 씨. 저는 서연이에요." "서연 씨…" 지훈이 이름을 한 번 되뇌듯 말했다. 그 짧은 순간, 서연은 이유 모를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저 이름 하나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뭔가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저도 서연 씨 이름이 궁금했어요. 매번 명찰을 슬쩍 보긴 했는데, 직접 듣는 거랑은 또 다르네요." 지훈의 말에 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도 자신의 이름을 궁금해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다. "명찰을 보셨었구나…" "네, 매번 커피 주시면서 이름표 다실 때마다 눈이 갔어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하면서도 달콤한 침묵이 흘렀다. 서연은 괜히 손에 든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3 "실례가 안 된다면, 지훈 씨는 이 근처에서 일하시나요? 매일 이 시간에 오시길래…"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했던 것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낸 순간이었다. "아, 네. 저 근처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글 쓰는 일이라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거든요. 집에서만 일하면 답답해서, 오후엔 늘 여기 와서 작업하곤 해요." "글을 쓰신다니, 어떤 글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소설이에요.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지만요." 지훈이 살짝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연은 그 대답 속에 숨은 옅은 씁쓸함을 놓치지 않았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그가, 사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멋있어요. 매일 여기서 글을 쓰신 거였구나." "그래서 늘 책을 읽고 계셨구나." "아, 그건 취미로 읽는 거고, 사실 작업은 노트북으로 따로 해요. 책은… 집중이 안 될 때 잠깐 머리 식히는 용도랄까요." 지훈이 살짝 쑥스러운 듯 웃었다. 서연은 그동안 궁금했던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이유, 가끔 미간을 찌푸리며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던 이유. 어쩌면 그건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의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오늘도 작업하러 오신 거예요?" "네, 오늘은 마감이 있어서요. 조용히 커피 한 잔 하면서 집중해보려고요." "그럼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있을게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지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방해라뇨, 서연 씨가 만들어주신 커피 마시면서 하는 작업이 제일 잘 되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서연은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일 텐데도, 그 한마디가 하루 종일 마음에 맴돌 것 같았다. 지훈이 늘 앉는 창가 자리로 향하고, 서연은 커피를 준비하며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이름을 알았다. 하는 일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서연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지훈 씨. 낯설던 이름이 벌써 입에 붙는 것 같았다. 카운터로 커피를 가져다주며 슬쩍 그의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화면 가득 채워진 글자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메모지에는 알아볼 수 없는 필체로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이번에도 차마 묻지는 못했다. 마감 시간, 서연은 지훈이 두고 간 쿠키 봉투를 꺼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는 동안, 오늘 하루의 짧은 대화들이 떠올랐다. 서연 씨. 그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혼자 웃어?" 퇴근 준비를 하던 민아가 쿠키를 오물거리는 서연을 보며 물었다. "안 웃었거든." "입꼬리가 아까부터 안 내려가는데?" 서연은 급히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민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정리를 이어갔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이제는 그저 '3시 손님'이 아니라 '지훈 씨'가 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연은 내일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카페 문을 나서며 올려다본 하늘은 어제의 비가 언제 왔냐는 듯 맑고 청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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