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전무후무한 집무실 브리핑
2026. 7. 21. · 👁 3
복도에 내려앉은 정적은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유독 크게 울릴 만큼 무거웠다. 임원들의 얼굴에 미묘한 의아함이 스쳤고, 후배 비서 다은은 경악 어린 눈으로 서진과 시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임 대표이사가 부임하자마자 수석 비서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를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건인데, 그 목소리에 담긴 묘한 온도는 단지 비즈니스적 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진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십 년 차 수석 비서였다. 당황스러움이 온몸을 잠식하려 했지만, 오랜 시간 단련된 프로페셔널한 본능이 극적으로 이성을 붙잡았다. 서진은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시우의 시선을 마주했다. “네, 대표님.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MH그룹 비서실의 모든 스케줄과 업무는 저를 통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지원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집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섞이지 않았다. 완벽한 공적 어조, 그리고 타인보다 조금 더 정중한 비즈니스용 미소. 시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진의 태도가 자신이 예상했던 당황이나 동요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칠 년 전 자신을 차버릴 때처럼, 서진은 지금 철저하게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대표와 직원의 관계로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시우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그래, 기대를 해보지. 십 년 차 수석 비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시우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거칠게 몸을 돌려 대표실 안으로 성성히 걸어 들어갔다. 뒤를 따르던 전략기획실 임원들이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았고, 문이 닫히기 직전 시우의 매서운 시선이 마지막으로 서진의 얼굴에 꽂혔다. “대박…… 대박사건! 수석 비서님, 방금 저거 뭐예요? 대표님이랑 옛날에 아시던 사이였어요? 아니, 어떻게 대표님이 비서님 이름을 그렇게 콕 집어서…….” 문이 닫히자마자 다은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서진의 팔을 미친듯이 흔들었다. 다른 비서들도 은근히 눈을 반짝이며 서진의 입만 바라보았다. 서진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힌 줄도 모른 채, 제자리에 박힌 듯 굳어 있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대학 동기야.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네?! 대학 동기요? 아니, 그럼 엄청 친하셨던…….” “다은 씨, 지금 한가하게 노닥거릴 때야? 대표님 첫날 일정 브리핑 자료, 수정본 세 번 검토하라고 했지. 안 그래도 첫인상부터 꼬투리 잡히게 생겼으니까 당장 서류 가져와.” 서진이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그치자, 다은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제 자리로 돌아갔다. 서진은 책상 의자에 주저앉듯 앉아 마른장갑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학 동기? 스쳐 지나간? 미친 소리 하지 마, 한서진. 넌 그 애 인생에 가장 잔인한 상처를 남긴 원수야.’ 칠 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둔 시우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지만 유독 집안의 지원 없이 스스로 일어asci야 하는 가난한 청년이었다. 반면 서진은 집안의 갑작스러운 몰락과 함께 엄청난 빚더미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었다. 시우가 미래를 약속하며 자신을 붙잡았을 때, 서진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제 현실이 그 발목을 잡는 지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장 모진 말로, 그가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거짓말을 던지며 그를 밀어내고 도망쳤었다. ‘비참하게 만들어서라도 떨쳐내야 했어. 그래야 그 사람이 살 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이 회사의 대표가 되어서 돌아온 거야. 그것도 내가 수석 비서로 있는 이 회사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때쯤, 인터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시우의 집무실 직통 전화였다. [수석 비서, 지금 당장 대표실로 들어와.] 짧고 건조한 목소리. 서진은 깊은숨을 한 번 내쉬고는, 태블릿 PC와 오늘 예정된 긴급 보고서 파일을 단단히 품에 안았다. 전쟁터로 향하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대표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탁 트인 통창 너머로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집무실이 나타났다. 시우는 가죽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서진을 서늘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서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책상 앞까지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시우는 서류를 검토하는 척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냉소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십 년 차 수석 비서라…… 세월 참 많이 흘렀네, 한서진. 그 남루했던 시절의 악몽 같은 기억도 이젠 다 지워졌나 봐? 얼굴빛이 아주 좋아 보여.” 첫 마디부터 가슴을 후벼 파는 날 선 도발이었다. 서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이를 악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공적인 자리입니다, 대표님. 사적인 이야기는 업무에 지장을 줍니다.” “공적?” 시우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구가 서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진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 하자, 시우는 서진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책상을 한 손으로 짚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시우의 몸에서 풍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수 냄새가 서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공적, 그래. 좋아. 네가 그토록 찾는 공적인 관계로 한 번 가보자고.” 시우가 서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낮게 읊조렸다. “앞으로 내 모든 스케줄, 식단, 비서실 결재 서류까지 전부 네 손을 거치게 할 거야. 십 년 차 프로 비서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내가 아주 가까이서 밀착 마크하며 검증해 줄 테니까.” 서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시우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 남자는 지금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방으로 옥죄며 숨통을 조이겠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서진 역시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무너지는 순간, 지난 십 년간 쌓아온 모든 커리어와 자존심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서진은 떨리는 손을 감추며 시우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기대하겠습니다, 대표님. 원하시는 만큼 완벽하게 보좌해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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