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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의 그 사람 · snow

제 1화. 지옥의 출근길

2026. 7. 15. ·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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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화면에 하얗게 반사되는 형광등 빛이 어쩐지 눈을 찌를 듯이 아팠다. 한서진은 사내 인트라넷 초기 화면에 떠 있는 인사 발령 공고를 정확히 삼 분째 미동도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뻣뻣하게 굳어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지도 못했다. [신임 대표이사: 강시우] 이름 석 자. 그리고 그 옆에 첨부된 고화질의 프로필 사진. 서른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콧날과 서늘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선, 그리고 사진을 뚫고 나오는 듯한 오만할 정도로 오뚝한 아우라. 대기업 그룹의 최연소 대표이사 자리에 앉기까지 그가 밟아온 화려한 스펙과 이력이 몇 줄의 텍스트로 요약되어 있었다. 대기업 회장실 십 년 차 수석 비서. 그동안 수많은 임원과 CEO의 교체를 지켜보며 어지간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한서진의 얼굴에서, 평생의 철칙과도 같았던 완벽한 포커페이스가 바스러지듯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설마. 동명이인일 리가 없잖아. 강시우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에 한둘이겠냐마는…… 이 얼굴이, 이 생김새가, 게다가 하필 나이가 서른둘인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며 새하얀 재로 변해가는 기분이었다. 강시우. 칠 년 전, 서진이 제 손으로 직접 목을 조이듯 모질고 매몰차게 차버렸던 바로 그 전남친이었다. “수석 비서님? 서진 씨? 정신 안 차리실래요?” 옆 자리에서 바쁘게 스케줄을 확인하던 후배 비서 다은이 서진의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서진은 꿈속에서 헤엄치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멍한 눈을 깜빡였다. “어, 어? 다은 씨, 방금 뭐라고…….”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한다고요! 신임 대표님 오늘 아침 열 시 정각 출근이십니다. 임원진 상견례랑 긴급 업무 보고 일정 꼬이면 저희 당장 모가지예요, 모가지. 아니 근데, 프로필 보셨어요? 진짜 대박이지 않아요? 연예인이야 뭐야. 키도 185 넘는대요. 독신이라는데 이번에 우리 비서실에 기조가 싹 바뀌는 거 아니에요?” 다은은 핑크빛 하트를 눈에 담은 채 화면을 번갈아 보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서진의 귀에는 그 소리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귓가를 겉돌 뿐이었다. ‘괜찮아. 진정하자, 한서진. 칠 년이야. 강산도 바뀐다는 칠 년이라고. 그동안 그 사람도 미국으로 유학 가서 완벽한 비즈니스맨으로 거듭났을 거고, 나 역시 이 바닥에서 구르고 또 구르며 십 년 차 수석 비서 타이틀을 달았어. 우리가 무슨 애들 장난하듯 연애하다 헤어진 사이도 아니고…… 아니, 애들 장난처럼 헤어지긴 했지. 내가 아주 몹쓸 짓을 하긴 했지만.’ 머릿속에서 이성과 본능이 쉴 새 없이 난투극을 벌였다. 스스로를 거듭 다독이며 마음을 억지로 짓눌러 담았다. 설마 대기업의 대표이사가 된 공적인 자리에서, 그 잘난 남자가 옛정에 매달려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겠는가. 오히려 자신을 기억도 못 하거나, 혹은 기억하더라도 완벽하게 사무적이고 차가운 타인으로 대우해 주는 것이 시나리오상 가장 베스트였다. 차라리 그 편이 서진에게도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길이었다. ‘그래,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자. 완벽한 비서의 태도로, 철저히 갑을 관계의 비즈니스맨으로 대하는 거야.’ 열 시 정각이 되기 5분 전. 회장실 앞 로비의 복기용 대리석 바닥이 울릴 정도로 묵직한 구두 소리가 멀리서부터 다가왔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던 비서실의 모든 키보드 소리가 일순간 멈춰 섰다. 다은을 비롯한 다른 비서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소매를 다듬었다. 서진 역시 깊은숨을 한 번 내쉬고는 완벽하게 각 잡힌 비서용 재킷의 단추를 채우며 로비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묵직한 유리 자동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열렸다. 수행 비서들과 전략기획실 임원들을 대동한 채, 걸어 들어오는 남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박혔다. 다크 네이비 컬러의 맞춤 수트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넓은 어깨,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흩어지는 서늘한 남자의 향수 냄새, 그리고 한층 더 깊어지고 예리해진 눈빛. 주변의 공기마저 압도적으로 가라앉히는 듯한 그 특유의 오만한 아우라는 칠 년 전 대학 캠퍼스 구석에서 보았던 시우의 모습과 겹쳐지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다른 차원의 거대한 벽처럼 다가왔다. 임원들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고, 비서실 직원들도 일제 허리를 구십 도로 꺾었다. “대표님, 환영합니다. MH그룹 회장실 수석 비서 한서진입니다.” 서진은 가장 완벽하고 기계적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45도 각도의 스마일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바짝 마른 입술이 떨리지 않도록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숨을 꾹 참아가며 최대한 나긋하고 프로페셔널한 목소리를 짜냈다. ‘지나가라. 제발 그냥 지나쳐서 대표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줘.’ 간절한 기도가 무색하게도, 남자의 발걸음이 서진의 코앞에서 뚝 멈춰 섰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것처럼 싸늘해졌다. 묵직한 구두굽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멎고, 서진의 머리 위로 묘하게 끈적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시간이 몇 배로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수석 비서, 한서진 씨?” 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귓속을 파고들듯 선명한 저음이 귓가를 때렸다. 서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상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서는 안 된다는 비서의 대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마주친 강시우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깊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표면 밑으로는, 서진을 단숨에 집어삼킬 듯 위험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우는 곧바로 지나쳐 가기는커녕, 오히려 한 걸음 더 서진에게 다가와 몸을 살짝 기울였다. 오직 서진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가 대리석 복간을 타고 스며들었다. “오랜만이네, 한서진. 칠 년 만인가?” 임원들과 비서들이 일제히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임 대표가 첫날부터 특정 비서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말투에 실린 미묘한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할 바보들은 없었다. 서진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깨달았다. 이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짜놓았던 평생의 계획은, 오늘 아침 출근길과 함께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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