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밀착 마크의 서막
2026. 7. 21. · 👁 4
대표실 안을 메운 공기는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내의 풍경만큼이나 삭풍이 불어 닥친 것처럼 차가웠다. 서진은 바짝 마른 입술을 살짝 적시며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숨소리마저 섞이지 않을 만큼 완벽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그래, 기대해 보지.” 시우가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태도 이면에는 서진을 옭아매겠다는 살벌한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늘 오후 세 시에 예정된 해외 파트너사와의 화상 회의 자료, 그리고 지난 분기 실적 분석 보고서. 그 두 가지를 지금 당장 내 책상 위에 올려놔. 십 년 차 수석 비서의 일 처리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지금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대표님.” 서진은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대표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블라우스가 등에 척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비서실 자리로 돌아온 서진은 의자에 앉자마자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수석 비서님, 저기…… 대표님이랑 진짜 옛날에 아시던 사이였어요? 아까 대표실 분위기 완전 살벌했던 거 아시죠? 다들 바깥에서 숨도 못 쉬고 있었어요.” 다은이 슬그머니 의자를 끌고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다은 씨, 호기심 가질 시간에 해외 파트너사 화상 회의 자료 최종본이나 다시 검토해. 대표님 스타일 알지? 조금의 오타나 허점이라도 잡히면 우리 둘 다 오늘 야근이야.” “아…… 넵! 알겠습니다!” 서진의 서늘한 기색에 다은은 황급히 제 자리로 돌아가 문서에 코를 박았다. 사실 서진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칠 년 전, 대학 시절의 시우는 늘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언제나 서진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어주던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서진이 던졌던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너랑 어울려주기엔 내 인생이 너무 팍팍해. 더 이상 연락하지 마.’ 제 입으로 뱉어놓고도 그날 밤 이불을 쥐어뜯으며 피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시우는 그 모진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 섰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는 휴학계를 내고 홀연히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그 상처 때문에…… 이 악물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겠지. 복수하려고.’ 서진은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과거의 일에 얽매여 지금의 커리어를 망칠 수는 없었다. 완벽하게 서류를 준비해 그의 허를 찌르는 것만이 이 위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후 세 시 정각. 서진은 완벽하게 제본된 보고서와 태블릿을 트레이에 담아 다시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들어가자, 시우는 창가에 선 채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트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팔뚝의 단단한 선이 눈에 들어왔다. “요청하신 해외 파트너사 화상 회의 자료 및 지난 분기 실적 분석 보고서 전달해 드립니다. 데이터 검증은 세 번 거쳤으며, 파트너사와의 시차를 고려한 주요 쟁점 사항은 요약본 2페이지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서진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보고서를 시우의 책상 위에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시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이 보고서와 서진의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잠시 후, 시우가 책상 앞으로 다가와 보고서를 한 장 넘기더니 이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일 처리 하나는 여전히 칼 같네. 십 년 차 타이틀이 아깝진 않다는 뜻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아니야. 테스트지.” 시우가 갑자기 의자에 앉으며 서진을 향해 손가락 까딱했다. “이리 와봐.” “네?” “가까이 와서 보라고. 이 파트너사 재무제표 3페이지, 지난 분기 대비 영업이익률 산출 근거가 이상하지 않아?”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시우의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숙여진 몸 위로 시우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밀려들었다. 서진이 서류를 내려다보며 대답하려던 찰나, 시우가 갑자기 의자를 뒤로 훅 밀며 일어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서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시우는 서진을 책상과 제 가슴 사이에 가둔 채 몸을 기울였다. 피할 새도 없었다. “대표님, 이건 사적인…….” “사적? 내가 지금 공적인 업무 지시를 내리고 있는 거 안 보여?” 시우의 눈동자가 위험할 만큼 가깝게 빛났다. 그의 손이 서진의 어깨너머로 책상을 짚으며 완전히 퇴로를 차단했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내 일정의 시작과 끝을 네가 책임지게 될 거야. 비서실 안에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출장이고 야근이고 무조건 내 전담이야. 도망칠 생각 따위는 애초에 하지 마, 한서진.” 심장이 귀끝까지 뛰어올라 쿵쾅거렸다. 시우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서진의 귓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칠 년 전의 차가운 눈빛 속에는, 여전히 자신을 향해 끓어오르는 뜨거운 집착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서진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시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물러설 곳 없는 전장 한복판에서, 그녀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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