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폭우 속의 고립
2026. 7. 22. · 👁 4
유리창 너머로 퍼붓는 비스듬한 장대비가 도시의 마천루를 온통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제 집무실에서 턱밑까지 다가왔던 시우의 뜨거운 호흡과 “더 이상 도망칠 생각 하지 마”라던 단단한 목소리가 서진의 귓가를 하루 종일 맴돌았다. 서진은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키보드를 쳐댔다. 차라리 일을 핑계로 머릿속을 새하얗게 비워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신은 서진에게 도망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수석 비서님, 긴급 건입니다.” 다은이 경직된 표정으로 서진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강원도 삼척 인프라 부지 매입 건으로 지자체 및 현지 토지주들과의 긴급 간담회가 잡혔습니다. 원래는 다음 주 일정이었는데, 반대파 주민들이 오늘 저녁에 무조건 대표 나와라 아니면 협상 파기다 선언을 해버려서요.” “오늘 저녁이라고?” 서진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오후 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네. 대표님께서는 지금 즉시 출발하자고 하십니다. 수행 기사님은 현지 도로 사정 때문에 4륜 구동 SUV 준비해 두셨고, 동행 비서는 수석 비서님 단 한 분만 지목하셨습니다.”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둘이 가는 지방 출장. 그것도 장대비가 내리는 이런 날에. 서울을 벗어난 검은색 SUV는 빗길을 가르며 남쪽으로 질주했다. 차 안은 기이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돌았다. 운전석의 수행 기사는 백미러조차 함부로 보지 못하고 직진 도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뒷좌석의 두 사람은 완벽하게 분리된 평행선처럼 각자의 창밖만을 응시했다. 시우는 수트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던져둔 채 무심하게 태블릿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서진은 그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도 온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 넥타이 윗단추를 살짝 푸는 나른한 손짓, 낮게 내쉬는 숨소리까지 차 안의 모든 공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기사님.” 정적을 깬 것은 시우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기상청 레이더 보니까 강원 남부 쪽에 호우경보가 내렸던데, 도로 사정은 괜찮습니까?” “아, 예 대표님. 국도 쪽은 이미 토사 유출로 일부 통제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현장 간담회 장소까지는 고속도로 우회해서 최대한 빨리 넘어가 보겠습니다만, 밤이 되면 빗길이 많이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기상 악화가 심각하다면 간담회를 서면이나 화상으로 대체하도록 토지주 측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사고라도 나면…….” “됐어.” 시우가 단칼에 서진의 말을 잘라냈다. 시우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덧붙였다. “현장을 직접 보지 않고 서류로만 타협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야. 그리고 한서진 씨, 내 걱정 할 시간에 네 손끝이나 좀 챙기지 그래? 아까부터 덜덜 떨고 있는데.” 서진은 깜짝 놀라 깍지 낀 손을 내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 때문에 떨고 있는데…….’ 서진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삼척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바람이 몰아치며 장대비가 장대처럼 쏟아붓고 있었다. 두 시간에 걸친 토지주들과의 험악한 협상은 시우의 냉철하면서도 과감한 협상력 덕분에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시우는 젊은 대표다운 기패와 진정성으로 완강하던 토지주들의 마음을 돌려놓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태풍급 강풍과 함께 쏟아지는 폭우가 도로 전체를 물바다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천둥과 번개가 밤하늘을 찢발기며 울려 퍼졌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차를 확인하러 갔던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산사태 위험 때문에 관성 터널과 아래쪽 국도가 전부 전면 통제되었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물론이고, 시내로 나가는 다리까지 물에 잠겨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고립이라는 뜻입니까?” 서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예, 수석 비서님. 현지 경찰들이 차량 통행을 완전히 막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머물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사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인근의 대형 리조트와 호텔들은 이미 갑작스러운 도로 통제로 발이 묶인 관광객들과 수해 복구 인력들로 만실이었다. 기사가 인근의 거의 모든 숙박업소를 뒤진 끝에 찾아낸 곳은, 부지 구석에 위치한 아담하고 오래된 전통 한옥 스타일의 고급 비즈니스 호텔 한 곳뿐이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 호텔도 방이 딱 하나 남았다고 합니다. 스위트룸 하나요.” 프런트 데스크 앞에서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방이…… 하나요?” 서진의 목소리가 뒤흔들렸다. “예, 다른 여관이나 모텔까지 전부 전기가 나간 상태라, 자체 발전기가 돌아가는 곳은 이 호텔 스위트룸 딱 하나뿐입니다. 기사님들은 기사 대기실 온돌방을 겨우 구했습니다만…….” 서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남녀가, 그것도 과거의 깊은 은怨으로 얽힌 전남친이자 현 대표이사인 남자와 한 방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니. “대표님, 제가 로비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대표님께서 방을 쓰십시오.” 서진은 십 년 차 수석 비서의 프로 의식을 발휘해 망설임 없이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시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시우는 서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프런트 직원에게 블랙 카드를 내밀었다. “그 스위트룸으로 주십시오.” 결재를 마친 시우가 카드와 객실 열쇠를 챙겨 들고는 서진을 돌아보았다. “한서진 씨.” “네, 대표님.” “내가 직원한테 로비 소파나 지키게 만드는 지독한 상사로 보여?” “그런 뜻이 아니라 공과 사를 구분하기 위해…….” “됐으니까 올라와.” 시우가 차가운 어조로 명령하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내 눈앞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로비에서 질질 짜며 밤새우다 내일 감기라도 걸리면, 그 수발은 누구 더러 들라는 거지? 당장 따라와.” 서진은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쥔 채 시우의 거대한 등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스위트룸 문이 열리자, 은은한 백열등 조명과 함께 묵직한 목재 향이 밀려들었다. 다행히 거실과 침실이 넓게 구분된 구조였지만, 사방이 폭우 소리로 가득 찬 고립된 공간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치워.” 시우가 젖은 수트 재킷을 벗어 의자에 던져두며 말했다. 그의 흰 셔츠는 비에 살짝 젖어 단단한 몸선이 은은하게 비쳐 보였다. 서진 역시 젖은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표님, 수건과 가운 준비해 두었습니다. 먼저 샤워하십시오.” 시우는 서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서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넓은 거실 안,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창밖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면에 길게 늘어뜨렸다. “너, 아까부터 계속 내 눈을 피하네.” 시우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대표님을 직시하는 것은 비서로서의 기본 예의가…….” “그놈의 비서 타령 좀 그만해!” 시우가 서진의 말을 끊으며 그녀의 어깨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서진의 몸이 끌려가 시우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서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칠 년 전에도 넌 그랬어. 늘 네 멋대로 벽을 치고, 내 생각을 하고, 내 마음을 가늠하면서 도망쳤지. 이번에도 비서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나를 외면할 생각이야?” 시우의 눈빛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밖보다 더 사납고 애틋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서진의 어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해봐, 한서진. 정말 나한테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아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내가 아직도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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