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위험한 비밀 연애
2026. 7. 22. · 👁 3
비밀 연애가 시작된 지 일주일. MH그룹 본사 건물 18층 대표이사실과 비서실은 겉보기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서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지난주 사내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었던 소문은 시우의 강력한 경고와 인사팀의 강력한 제재 조치로 어느 정도 진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완벽하게 연출된 연극에 불과했다. “대표님, 오전 10시 기획조정실 주간 업무 보고 일정입니다.” 서진은 완벽히 각이 잡힌 정장 차림으로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표정은 무미건조했고, 목소리는 칼같이 차가웠다. 서류판을 든 채 시우의 집무상 앞에 다가선 그녀는 완벽한 ‘십 년 차 수석 비서’ 그 자체였다. “보고서 결재 부탁드립니다.” 시우는 만년필을 든 채 서진이 내밀어 준 서류를 훑어보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보고서의 숫자들이 아니라, 서진의 단정한 입술과 셔츠 카라 사이로 보이는 가녀린 목선에 머물러 있었다. “한 수석.” “네, 대표님.” “오늘 립스틱 색이 좀 바뀐 것 같은데.” 서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진은 슬쩍 사방을 살핀 뒤, 집무실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지 확인하곤 목소리를 낮춰 살벌하게 속삭였다. “강시우 씨, 지금 장난해요? 밖에 다은 씨랑 보좌진들 다 대기 중입니다. 공과 사 구분하기로 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러십니까?” “블라인드 내려가 있고, 소음 차단 유리야.” 시우가 피식 웃으며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서진이 들고 있던 서류판을 툭 쳐서 서진의 손을 끌어당겼다. “앗……!” 순식간에 서진의 몸이 기울어지며 시우의 무릎 위에 풀썩 앉게 되었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서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깊게 숨을 들쉬었다. “아침부터 너무 차갑게 굴잖아. 보는 눈 없으니까 1분만 이러고 있자.” “미쳤어요, 진짜?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서진이 가슴을 세게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시우는 서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놔주지 않았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그만의 뜨거운 체온이 번지자 서진 역시 점차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았다. ‘똑똑-’ 그때, 집무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표님, 기획조정실 이태성 팀장님 올라오셨습니다!” 다은의 목소리였다. 서진은 깜짝 놀라 시우의 가슴을 세게 밀쳐내고 무릎 위에서 튀어 일어났다. 옷가지를 황급히 정돈하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서진의 얼굴은 이미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었다. 시우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핥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이태성 팀장이 들어왔다. 이 팀장은 서진의 약간 번진 립스틱과 가쁜 숨, 그리고 시우의 약간 풀어진 넥타이를 매서운 눈으로 캐치했다. 비록 겉으로는 아침 인사를 건넸지만, 이 팀장의 눈빛에는 묘한 의구심과 차가운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한 수석님,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아침 일찍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 팀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진에게 건넸다. “아…… 아닙니다, 이 팀장님. 업무 보고 진행하시죠.” 서진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듯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한 비밀 연애는 서진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달콤하고 아슬아슬한 비밀 연애에 진짜 위기가 찾아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시우는 오랜만에 서진과의 칼퇴근 데이트를 계획하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을 피해 서진의 집 근처 소소한 선술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이었다. 퇴근 시간 직전, 서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표실의 잔여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비서실 전용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급스러운 모피 코트를 두르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육십 대 후반의 여성이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의 등장에 비서실 직원들은 물론, 층 전체의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MH그룹 회장 부인이자, 강시우의 어머니인 손명순 여사였다. “어머, 이사장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비서실 직원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진은 십 년 차 수석 비서답게 침착하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사장님. 수석 비서 한서진입니다. 대표님께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손 여사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서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도도하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손 여사는 서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집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보고할 필요 없다. 내 아들 방 들어가는 데 비서 허락까지 받아야 하니?” 손 여사는 거침없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우 역시 뜻밖의 어머니의 방문에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사전에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내 아들이 사장으로 부임했는데 얼굴 한번 보러 오는 게 무슨 사전 예약이 필요하니?” 손 여사가 소파에 앉으며 고고하게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는 뒤따라 차를 내오기 위해 들어온 서진을 차갑게 지목했다. “차는 됐고, 자네가 한서진 수석 비서인가?” “네, 이사장님.” “요즘 사내 찌라시가 아주 지저분하더구나. 삼척 출장에서 우리 시우랑 스위트룸에 묵었다는 그 비서가 자네지?” 손 여사의 직구에 집무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시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둡게 굳어졌다. “어머니, 그건 악의적인 루머라고 이미 처리한 일입니다. 비서실 직원한테 무례하게 그러지 마세요.” “무례?” 손 여사가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내 아들 주변 관리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무례하니? 그리고 한 수석, 자네 칠 년 전에도 우리 시우 만났던 그 가난한 집 딸 아닌가?” ‘쿵-’ 서진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손 여사는 이미 칠 년 전 서진의 신상과 과거를 모조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시우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손 여사는 서진을 쏘아보며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 아들이 미국에서 고생하고 돌아와서 이제 막 그룹 핵심으로 자리 잡는 중이다. 칠 년 전에 알아서 잘 떨어져 나갔으면 끝까지 숨죽이고 살 것이지, 어떻게 다시 내 아들 옆에 붙어서 이런 추잡한 소문을 만들어내니?” 서진은 손끝을 하얗게 질리도록 감아쥐었다. 십 년 동안 쏟아부은 노력이, 이 자리까지 올라온 수많은 밤의 피땀이 단 한순간에 ‘성공한 아들에게 다시 붙은 칠 년 전 가난한 여자’로 폄하당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당장 나가세요. 내 집무실에서 제 직원한테 그딴 막말하는 거 용납 못 합니다.” 시우가 서진의 앞을 막아서며 어머니를 향해 서늘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서진은 알고 있었다. 손 여사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를. 두 사람의 아슬아슬했던 비밀 연애는 이제 사내 루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장벽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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