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지훈의 사정
2026. 7. 22. · 👁 5
#1 서점에서의 그날 이후, 서연은 매일 오후 세 시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다음 날, 지훈은 오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나 보다.' 서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창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사흘째가 되자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계속 문 쪽을 흘끗거리게 되었다. 늘 같은 시간에 열리던 문이 조용히 닫혀 있는 것 같은 그 텅 빈 느낌을, 서연은 이전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커피를 내리다가도, 손님을 응대하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시선이 문 쪽에 가 있었다. "언니, 요즘 그 손님 안 보이네." 민아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게… 무슨 일 있나." "연락 안 해봐?" "괜히 신경 쓰이게 할까 봐." 서연은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거웠다. 지난번 나눈 짧은 메시지 이후로 몇 번 안부를 주고받긴 했지만, 먼저 연락하기엔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둘째 날 저녁, 서연은 몇 번이나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별일 없으세요?'라는 짧은 문장 하나를 썼다 지웠다 하다가, 결국 보내지 못했다. 괜한 오지랖처럼 보일까 봐, 혹은 부담스럽게 느껴질까 봐 걱정이 앞섰다. 나흘째 되던 날 오후,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서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지훈이 서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피곤함이 짙게 배어 있는 표정, 며칠 못 잔 듯한 눈 밑 그늘. "오랜만이에요." 지훈이 옅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그 미소에는 힘이 없었다. #2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서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 그냥… 요즘 좀 힘든 일이 있어서요." 지훈이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은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한 커피를 준비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얘기하고 싶으시면 들어드릴게요. 물론 부담스러우시면 안 하셔도 되고요." 지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요즘 글이 하나도 안 써져요. 몇 달째 붙잡고 있던 작품인데, 출판사에서도 반응이 시원찮고… 이대로 계속해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어졌어요." 서연은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지훈의 맞은편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평소라면 손님과 이렇게 마주 앉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격식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프리랜서로 산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외로운 일이더라고요. 혼자 방 안에서 몇 시간씩 글을 붙잡고 있다 보면, 이게 맞는 길인지 계속 의심이 들어요. 그래서 요 며칠은 아예 카페에도 못 왔어요. 오는 것조차 자신이 없어서." 지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서연은 그 말속에 담긴 무게를 조용히 느끼며 귀를 기울였다. "글이 안 풀릴 때는 사람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더라고요. 특히 서연 씨한테는 늘 괜찮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요즘은 그럴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피했던 것 같아요." 지훈의 솔직한 고백에 서연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늘 여유롭고 다정해 보이던 그가, 이렇게 스스로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애틋하게 다가왔다. "저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줄 필요는 없어요. 저도 완벽한 사람 아니거든요. 저야말로 손님 앞에서 실수 안 하려고 매일 애쓰는 걸요." 서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지훈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여기 오는 시간이, 저한테는 하루 중에 유일하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서연 씨가 만들어주는 커피 한 잔, 그리고 짧은 대화.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마 서연 씨는 모르실 거예요." #3 서연은 순간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늘 여유롭고 다정해 보이던 지훈의 모습 뒤에, 이렇게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지훈 씨, 저는 잘 모르지만… 글이 잘 안 써지는 날도 있고, 잘 써지는 날도 있는 거 아닐까요. 지금 당장 결과가 안 보인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리고… 저는 지훈 씨가 매일 이 자리에서 진지하게 글과 씨름하는 모습, 꽤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과가 어떻든, 그 시간들이 헛되지는 않을 거예요." 지훈이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서연 씨 말 들으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요. 사실 요 며칠 아무한테도 이런 얘기 못 했거든요. 가족한테도, 친구한테도. 다들 걱정만 할까 봐." "저한테는 편하게 얘기해주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걱정하는 게 뭐가 나쁜 일이겠어요.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서연의 말에 지훈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서연 씨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말로 사람 마음을 툭 건드리시네요." "그래요? 좋은 의미겠죠?" "당연하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짧게 웃었다. 무겁던 공기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힘든 일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얘기해주세요. 저 생각보다 얘기 잘 들어주는 편이에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지훈도 따라 웃었다. "그럴게요. 다음부턴 며칠씩 안 오는 일 없도록 할게요." "그거면 됐어요." 그날 오후, 지훈은 평소보다 더 오래 카페에 머물렀다. 노트북을 펼치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지만, 서연은 그가 이전보다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감 시간, 지훈이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서연 씨 덕분에 다시 시작할 힘이 좀 생긴 것 같아요." "내일도 이 시간에 기다릴게요." 서연의 말에 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문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연은 두 사람 사이가 이제 단순한 손님과 바리스타의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서로의 약한 부분을 나눌 수 있는 사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서연은 그날 저녁 내내 되새겼다. 퇴근길, 서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 나눈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늘 여유롭고 단단해 보이던 지훈에게도, 이렇게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하루였다. 어쩌면 그건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언니, 오늘 그 손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표정이 계속 진지하던데." 마감을 함께 하던 민아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 얘기 들어줬어." "오, 언니 완전 상담사 다 됐네." "상담사는 무슨. 그냥 옆에 있어준 것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연은 오늘 나눈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가장 힘든 순간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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