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늘 같은 자리
2026. 7. 14. · 👁 16
#1 오후 두 시 오십오 분. 서연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는 카운터 옆 선반에서 머그컵 하나를 꺼내 미리 데워두었다. 손님이 오기도 전에 컵부터 준비하는 건 이상한 습관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이 먼저 움직였다. "또 준비하는 거야?" 동료 바리스타 민아가 원두를 채워 넣으며 웃었다. "뭘." "3시 손님 컵. 언니 요즘 그 사람 오는 시간에 맞춰서 미리 손 풀던데." 서연은 대답 대신 괜히 행주로 카운터를 닦았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실이었다. 카페 '오후의 창'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작은 가게였다. 회전율이 빠른 번화가 카페들과 달리 손님 대부분이 근처 주민이거나 단골이었고, 서연은 그들의 얼굴과 습관을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매일 오후 세 시. 정확히 세 시.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 늘 같은 자리.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늘 같은 메뉴. 책을 한 권 들고 와서 한 시간 남짓 머물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남자. 이름도 몰랐다. 그저 마음속으로 '3시 손님'이라 불렀다. 처음엔 그냥 규칙적인 손님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면서 서연은 자신이 그 사람의 사소한 것들까지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유독 느려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 커피가 반쯤 남으면 꼭 창밖을 한 번 바라본다는 것. 가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책의 같은 페이지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는다는 것. 그건 관찰이라기보다는, 어느새 익숙해진 시선이었다.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서연은 시계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세 시 정각. 고개를 들자 예상대로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재킷, 옆구리에 낀 책 한 권, 살짝 헝클어진 머리.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늘 앉는 창가 자리로 향했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님을 이렇게까지 유심히 보는 건 처음이었다. 카페에서 삼 년을 일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갔지만, 누군가의 걸음걸이나 앉는 자세까지 눈에 익힌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달랐다. 의자를 당겨 앉는 소리, 가방을 내려놓는 순서, 책을 펼치기 전 잠깐 창밖을 바라보는 습관까지, 어느새 서연의 머릿속에 하나의 풍경처럼 자리 잡아 있었다. #2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맞으시죠?" 서연이 먼저 물었다. 매번 물어보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질문이었지만,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네, 맞아요." 남자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옅은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서연은 그 미소가 매번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는 걸, 애써 모른 척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서연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썼다. 원두의 분쇄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물 온도를 손등으로 느껴보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가 마시는 커피니까.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컵을 내려놓으며 슬쩍 그의 앞에 놓인 책 표지를 훔쳐보았다. 낯선 제목의 소설이었다. 몇 번이고 궁금했지만 물어본 적은 없었다. 손님과 바리스타 사이에는 지켜야 할 적당한 거리가 있다고, 서연은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짧게 인사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연은 카운터로 돌아와 다음 손님을 맞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창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매일 이 시간에 이곳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건,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프리랜서일까, 아니면 요즘 쉬고 있는 걸까. 손님의 사정을 함부로 짐작하는 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은 자꾸만 그쪽으로 흘러갔다. 카운터 너머로 다른 손님이 주문을 하는 동안에도, 서연의 시야 한쪽에는 늘 창가 자리가 걸려 있었다. 남자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 스치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착각일 게 분명한데도, 그 사소한 소리 하나에까지 신경이 쓰이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한 시간 남짓, 남자는 늘 그렇듯 조용히 책을 읽었다. 가끔 창밖을 보고, 가끔 커피잔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그 사이 서연은 평소와 다름없이 주문을 받고, 라떼 아트를 그리고, 설거지를 했다. 그러나 시선은 자꾸만 창가로 향했다. "언니, 저 사람 이름이라도 물어봐. 매일 저렇게 신경 쓰면서." 마감 준비를 하던 민아가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찔렀다. "신경 안 써." "거짓말. 오늘도 세 번이나 저쪽 쳐다봤거든?" 서연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민아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됐고, 재고 정리나 도와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연의 시선은 다시 한번 창가로 향했다. 남자가 책장을 넘기며 살짝 미간을 좁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표정은 뭘 뜻하는 걸까. 재미있는 대목일까, 아니면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라도 있는 걸까. 서연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궁금한 게 자꾸만 늘어가는 자신이 낯설었다. 재고 창고에서 원두 봉지를 옮기면서도, 서연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그 표정이 계속 맴돌았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있길래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슬픈 장면일까, 아니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대목일까. 손님의 사생활을 이렇게까지 궁금해하는 게 온당한 일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궁금증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각, 남자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컵을 반납대에 가져다 놓으며 서연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잘 마셨습니다." "또 오세요." 늘 하던 인사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짧은 인사말이 유독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도 모르고, 하는 일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서연은 반납대에 놓인 빈 컵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리스타로 일한 지 어느덧 삼 년. 매일 비슷한 하루, 비슷한 손님들 속에서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을 보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하루의 중심이 오후 세 시로 옮겨가 있었다. 다른 어떤 일과보다도, 그 시간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는 걸 이제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컵 정리 다 했어?" 민아의 물음에 서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다 했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니야." 서연은 얼른 고개를 젓고는 다음 손님을 맞으러 카운터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는 사람. 어쩌면 그 규칙적인 만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기대로 자라나고 있는 건 아닐까. 창밖으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분주했던 카페 안이 서서히 한산해지고, 주황빛 햇살이 창가 자리를 물들였다. 방금 전까지 지훈이 앉아 있던 그 자리를 서연은 잠시 바라보았다. 빈자리인데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일도 오후 세 시가 되면, 저 문이 다시 열릴 것이다. 그리고 서연은, 그 사실이 싫지 않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감을 마치고 앞치마를 벗으며, 서연은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세 시가 되면 자신의 시선은 어김없이 문 쪽을 향할 거라는 것. 가게를 나서며 서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이 짙어지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표정으로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올지, 어떤 페이지를 펼치고 어떤 대목에서 미간을 찌푸릴지, 아직 알 수 없는 것들이 이상하게도 기다려졌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가벼운 것 같다고, 서연은 애써 모른 척하며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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