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견습생 (1)
2026. 7. 15. · 👁 5
“야, 엘런. 바닥에 핏자국 안 보이냐?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녀?” 날카로운 목소리가 세글러 마탑 지하 3층, 연금술 실험실의 탁한 공기를 갈랐다. 엘런은 허리를 숙인 채 걸레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가일 선배님. 바로 닦아내겠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쓸모없는 새끼. 마탑에 들어온 지 3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마나 한 톨을 못 느껴서 바닥이나 닦고 있는 꼴이라니. 내가 네 동기였으면 부끄러워서 진작에 한강, 아니 저 마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을 거다.” 가일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엘런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어깨에 마력을 실어 부딪친 탓에 엘런의 몸이 휘청이며 대리석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찰팍-! 양동이에 담겨 있던 구정물이 엘런의 낡은 견습 로브를 적셨다. 가일과 그 주변에 있던 다른 견습 마법사들이 일제히 비열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어이쿠, 조심 좀 하지? 안 그래도 지저분한 녀석이 더러운 물까지 뒤집어썼네.” “내버려 둬. 저러라고 마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거잖아. 마나도 없는 새끼가 몸이라도 써야지.” 그들은 비웃음을 남긴 채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엘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흑발이 흘러내렸다. 그의 눈빛은 묵묵했다. 슬퍼하거나 분노로 부르르 떨지도 않았다. 지난 3년간 이런 일은 일상이었다. 분노는 에너지를 낭비할 뿐이라는 것을 엘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나.’ 엘런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세계에서 마법사는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대륙에서 가장 거대하고 권위 있는 ‘세글러 마탑’은 천재 마법사들이 모이는 성지였다. 엘런 역시 3년 전, 아주 미미하지만 특이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어 기적적으로 이곳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입탑 첫날부터 지금까지, 엘런은 마탑에서 가르치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마나를 느끼지 못했다. ‘마나는 대기 중에 흐르는 엄격한 규칙이다. 그 규칙의 흐름을 지각하고, 심장에 마력을 쌓아 올려라.’ 교과서에 적힌 구절을 수천, 수만 번을 되새기며 명상을 하고 호흡을 했다. 동기들이 기초적인 라이트(Light) 마법을 성공시키고, 정식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갈 때도 엘런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결국 그는 마탑의 최하층, ‘만년 막내 견습생’이자 잡일꾼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엘런은 젖은 옷을 대충 짜내고 가일이 쏟고 간 연금술 재료의 핏자국을 깨끗이 지웠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일과가 남아있었다. 그것만 끝내면 좁아터진 지하 숙소로 돌아가 쉴 수 있었다. 엘런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탑의 더 깊은 지하로 향했다. 세글러 마탑은 지상으로 80층까지 솟아있지만, 지하로도 거대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는 견습생들의 숙소와 하급 실험실, 그리고 일반 서고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지하 4층. 그곳은 정식 마법사들조차 마탑주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제한 구역이었다. 엘런이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 마탑의 온갖 잡동사니와 폐기 마도서를 관리하는 폐기물 처리장이 그 층의 초입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갑고 무거워졌다. 마나가 가득 찬 상층부와 달리, 이곳은 가라앉은 마력의 찌꺼기들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는 불쾌한 감각이 들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엘런조차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창고 문을 열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엘런은 오늘 상층부 연구실에서 버려진 쓸모없는 양필지 더미와 깨진 마력석 파편들을 자루에서 쏟아냈다. “이것만 분류하고 자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쓰레기를 분류하던 그때였다. 팅-. 어디선가 아주 미세한, 맑은 종소리 같은 것이 엘런의 귓가를 스쳤다. 엘런의 손이 멈췄다. “...무슨 소리지?” 바람이 불 리 없는 지하 깊은 곳이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창고 안에서, 엘런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고 구석, 수십 년은 방치된 듯한 거대한 책장 뒤편이었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어두운 구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책장 뒤로 다가가자, 벽면의 대리석이 살짝 어긋나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숨겨놓은 듯한 틈새였다. 엘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책장을 밀어냈다. 엄청난 무게였지만, 지난 3년간 잡일로 단련된 몸 덕분에 삐걱거리며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숨겨져 있었다. “지하 5층...? 마탑에 이런 곳이 있었나?” 안내도에도, 그 어떤 선배들의 이야기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장소였다. 마탑의 규칙 중 가장 엄격한 것은 ‘허가되지 않은 구역에 출입하지 말 것’이었다. 걸리면 즉시 파문이거나, 더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이성적인 판단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하지만 엘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요동친 적 없던 몸 내부의 무언가가, 저 아래를 향해 강렬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잖아.’ 만년 꼴찌, 마나도 못 느끼는 낙제생. 이대로 살다가 몇 년 뒤면 마탑에서 쫓겨나 부랑자가 될 운명이었다. 엘런은 침을 꿀꺽 삼키고, 벽면에 걸려 있던 마력 램프를 들었다. 그리고 어둠이 자욱한 돌계단 아래로 발을 내딛기 한 걸음씩 내려갔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마력 램프의 희미한 불빛만이 어둠을 몰아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마침내 발끝에 평평한 바닥이 닿았다. 램프를 높이 들어 사방을 비춘 엘런은 그만 숨을 들이켰다. “아...” 그곳은 거대한 광장이었다. 사방의 벽면은 천장 끝까지 닿아 있는 거대한 서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천, 수만 권은 되어 보이는 책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꽂혀 있었다. 그리고 광장 중앙에는 오래된 석조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 단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책 표지는 정체모를 가죽으로 감싸여 있었고, 그 위에는 기괴한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빛은 바로 그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런은 자석에 이끌리듯 석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 표지에 새겨진 문자를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마탑에서 쓰는 고대어였다. [ 세계의 진실과 왜곡된 마나 ] “왜곡된 마나...?” 엘런은 떨리는 손을 뻗어 책 표지를 어루만졌다. 그 순간, 지독하게 차가운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와 뇌리를 강타했다. 쿠구구구궁-!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았다. 엘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책상 위로 쓰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흐려지며, 책의 페이지가 스스로 스르륵 넘어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정보의 홍수가 엘런의 영혼으로 직접 들이쳤다. [세글러 마탑의 기초 마나 공식: 제1조 3항. 마나를 받아들일 때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시키며 압축하라.] 머릿속에서 마탑의 교과서 내용이 떠올랐다. 동시에, 책에서 흘러나온 기괴한 음성이 그 내용을 산산조각 냈다. -거짓이다. -그것은 인간의 그릇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족쇄. 마나를 심장에 가두는 순간, 인간은 세계의 진짜 흐름으로부터 격리된다. 세글러 마탑의 마나 공식은 왜곡되었다. “뭐... 라고...?” 엘런은 전신을 결박당한 듯한 고통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마탑의 공식이 왜곡되었다니? 대륙 최고의 마법사들이 수백 년간 다듬어온 공식이 전부 거짓이라는 말인가? -진짜 마나는 가두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동화되는 것이다. -심장이 아닌, 전신의 세포를 열어라. 마나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네가 곧 마나가 되어라. 그와 동시에 엘런의 뇌리에 새로운 호흡법과 회로도, 즉 ‘진짜 세계의 호흡법’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엘런은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린 엘런은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그 공식을 따라 해 보았다. 지난 3년간 마탑의 공식으로는 미동도 없던 몸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심장이 아닌 전신의 기공을 연다는 느낌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윽...!” 엘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아니, 마탑의 그 어떤 고위 마법사도 묘사한 적 없는 정순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사방에서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마나’였다. 하지만 마탑의 교과서에서 말하던 ‘딱딱하고 통제해야 하는 힘’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자연 그 자체였다. 그 순수한 마나가 엘런의 전신 세포로 스며들었다. 막혀 있던 혈이 거침없이 뚫리며, 몸 안의 모든 감각이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였고, 수십 미터 떨어진 서가의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마나가 전신을 순환하며 엘런의 몸을 재조합하고 있었다. “이게... 진짜 마나라고?” 엘런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끝에서 은은한 푸른빛의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독하게 밀도가 높고 깨끗한 마력이었다. 마탑의 공식이 틀렸던 것이다. 자신이 재능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들이 가르친 왜곡된 방식이 엘런의 특이한 체질과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왜곡된 방식으로 마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엘런은 떨리는 눈으로 다시 책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넘어가던 책의 페이지가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에는 새로운 글귀가 떠올랐다. [첫 번째 진실을 깨달은 자에게 통로를 허락하노라.] 지하 서고 전체를 감싸고 있던 무거운 중압감이 사라졌다. 이곳은 단순한 금지 구역이 아니었다. 마탑의 지배층이 숨겨온 세계의 거대한 미스터리가 봉인된 장소였다. 엘런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3년 동안 죽어 있던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할 수 있어.” 그는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책은 다시 평범한 낡은 마도서의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엘런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진짜 마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밤새도록 지하 서고에 앉아 진짜 호흡법을 반복했다. 마나가 전신을 돌 때마다, 그의 마력 친화력과 밀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압도적인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엘런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급 견습생의 로브를 입고 지하 3층 연금술 실험실로 향했다. 몸은 가벼웠고, 세상 모든 마나의 흐름이 눈에 보일 듯 선명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마력을 숨겼다. 아직은 힘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어이, 똥걸레 왔냐? 오늘 아침 청소는 왜 이렇게 늦었어?” 어제 엘런을 밀쳤던 수석 견습생 가일이었다. 그는 벌써 정식 로브에 가까운 화려한 옷을 입고, 주위에 추종자들을 거느린 채 오만하게 서 있었다. 엘런은 묵묵히 걸레를 집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서고 정리를 하느라 늦었습니다.” “새끼가 꼬박꼬박 말대꾸네? 야, 마나도 없는 새끼가 서고 책은 읽어서 뭐 하냐? 글자나 읽을 줄 알아?” 가일이 걸어와 엘런의 손에 들린 걸레를 발로 밟았다.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몸 좀 풀어야겠다. 야, 낙제생. 너 나랑 기초 마법 대결 좀 하자.” 주변의 견습생들이 오오, 하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몰려들었다. 가일은 이번 달 말에 있을 정식 마법사 시험을 앞두고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 제물로 마나도 못 느끼는 엘런이 딱이었던 것이다. “가일 선배님, 저는 마나를 쓰지 못합니다. 대결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엘런이 차분하게 말했다. “누가 마법 쓰래? 넌 그냥 샌드백이나 하라고. 싫어? 싫으면 지금 당장 마탑주님께 가서 네 발로 나가겠다고 청원하든가.” 가일이 비열하게 웃으며 손끝을 튕겼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화르륵, 하며 주먹만 한 불꽃, ‘파이어 볼(Fire Ball)’의 기초 형태가 피어올랐다. 엘런은 가일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두렵고 대단해 보였던 가일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엘런의 눈에는 가일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도 조잡하고, 뒤틀려 있으며,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억지로 마나를 쥐어짜 내어 심장에 과부하를 주며 가두는 방식. 저건 마법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을 갉아먹는 자해 행위에 가까웠다. ‘저렇게 약한 불꽃을 만드는데 저토록 많은 마나를 낭비하다니.’ 엘런은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바닥만 닦으며 살 수는 없다. 지하 서고의 비밀을 더 탐구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자신을 귀찮게 하는 파리 새끼들은 치워버려야 했다. 엘런이 걸레를 내려놓고 가일을 똑바로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가일 선배님.” 엘런의 눈빛이 전과 다르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본 가일이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코웃음을 쳤다. “겁 대가리 상실했군. 조절은 안 해줄 테니 병원에 실려 갈 준비나 해라.” 실험실 중앙의 넓은 공터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주변 견습생들이 낄낄거리며 구경판을 짜기 시작했다. 세글러 마탑의 만년 꼴찌와 수석 견습생의 대결. 아무도 결과를 의심하지 않는, 잔인한 유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댓글 0
로그인하고 감상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