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계약 이상으로
2026. 7. 16. · 👁 4
아버지의 수술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은은 병원 원무과에 들러 수술비 견적을 다시 확인했다. 계약 조건에 따라 도현 쪽에서 병원비를 지원해주기로 했지만, 정확히 어느 범위까지인지 아직 세세하게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기, 저희 아버지 수술비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는데요." 원무과 직원은 컴퓨터 화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한동원 님 병실료랑 수술비, 이미 전액 정산 완료되셨는데요. 게다가 회복 후 물리치료 비용까지 별도로 예약되어 있으시더라고요." 소은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네? 전액이요? 저는 계약서에 적힌 기본 수술비만 해당되는 줄 알았는데……." "잠시만요, 확인해드릴게요. 아, 여기 특별 병실로도 업그레이드되어 있고, 담당 교수님 직접 집도로 스케줄 잡혀 있으시네요." 소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계약서에는 분명 '표준 수술비 및 치료비 전액 지원'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었다. 특별 병실이나 담당 교수 직접 집도 같은 건 언급된 적이 없었다. 병원을 나서며, 소은은 도현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저희 아버지 병실이랑 수술 관련해서 뭔가 추가로 하신 거 있으세요?" "아, 확인하셨군요." 도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건 계약 범위 밖의 일이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아버님 상태 확인해보니, 표준 병실보다는 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더라고요. 담당의도 이 분야 최고 권위자로 알아봤고. 어차피 하는 김에 제대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계약에도 없는 부분을 대표님 마음대로 결정하시면 안 되잖아요." 소은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도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대답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버님 건강 문제인데, 굳이 비용 아끼면서 위험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지금 화가 나는 건 비용 문제가 아니에요." 소은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건 계약이잖아요. 계약 이상으로 해주시면, 저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중에 계약 끝나면 다 정산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대표님이 그냥 베푸시는 호의인가요?" 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은은 그 침묵 속에서 그가 무언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계약 이상으로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소은은 그 안에 담긴 서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은은 한참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며칠 후, 소은은 병원에서 아버지의 수술 전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원무과를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병실 배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고, 담당 교수 역시 바뀌지 않았다. "저기, 이거 취소 요청 안 들어갔나요?" "아, 그 부분은 이미 확정된 사항이라 취소가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병원 측에서도 특별히 신경 쓰라는 요청을 받으셨다고……." 소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현이 취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병원을 나서며, 소은은 다시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계약 이상으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근데 왜 그대로예요?" "이건 취소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왜요?" "이미 담당 교수님 스케줄 다 조정하고, 병실도 확보한 상태예요. 지금 취소하면 아버님 수술 일정 자체가 밀릴 수도 있습니다. 아버님 건강이 걸린 문제를 계약 조항 때문에 미룰 수는 없습니다." 소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도현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이건 계약이 아니라, 그냥 제 개인적인 결정입니다. 소은 씨가 불편해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아버님 건강보다 계약 조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소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도현의 대답이 짧고 담백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소은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계약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계약서상으로는. "……고마워요, 대표님. 근데 다음부터는 이런 일 있으면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세요. 저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미리 얘기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소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현의 행동이 계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이제는 소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마음이 이미 계약서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소은은 아버지의 병실에 들러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편안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소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모든 게 계약 덕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자신들 사이에 자라나고 있다는 걸, 소은은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병실을 나서며 소은은 복도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창밖으로 밤하늘이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도현과 나눈 문자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사무적이던 초반의 메시지들 사이로,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다정한 문구들이 섞여 들어와 있었다. '계약 이상으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자꾸 그 선을 넘으실까.' 소은은 씁쓸하게 웃으며 벤치에 등을 기댔다. 처음 만났을 때 재수 없고 냉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도현이, 이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해주고, 자신의 상처까지 나눠주던 그 사람이, 진짜 도현의 모습인지 아니면 계약을 잘 이행하기 위한 배려인지 소은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현에게서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아버님 수술 잘 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짧은 한 줄이었지만, 소은의 마음을 데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답장을 적었다. [고마워요. 대표님 덕분에 마음이 좀 놓여요.] 답장을 보내고 나서, 소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약서의 7조가 다시 떠올랐지만, 이제는 그 조항이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지 그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계약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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