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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 연애 매뉴얼 · snow

3화. 절대 진심이 되지 말 것

2026. 7. 15. ·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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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의 통유리창 너머로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소은은 도현의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지만, 여전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 연애라니…… 지금 저한테 장난치시는 거예요?” “장난으로 이런 얘기를 꺼낼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도현은 서류 봉투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깔끔하게 정리된 조항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 기간, 지원 내역, 위약금 조항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저희 할아버지, 그러니까 회장님께서 최근 들어 제 결혼 문제로 압박을 넣고 계십니다. 정략결혼 상대까지 정해놓으신 상태고요.”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할아버지는 제가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적어도 그 결혼 얘기는 미루실 겁니다. 저는 시간이 필요하고, 당신은 돈이 필요하죠.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합니다만.” 소은은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의 인생을, 감정을 이렇게 사업 계약처럼 다루는 남자라니. “제가 왜 그런 위험한 일에 끼어야 하죠? 언론에 노출되고, 대표님 집안 사람들한테 시달릴 수도 있는데.” “그 부분은 최대한 관리하겠습니다. 공식 석상 몇 번, 그리고 필요할 때 동행하는 정도면 됩니다. 사생활까지 침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도현은 계약서의 한 조항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리고 이건 중요한 부분인데, 반드시 지켜주셔야 할 조건입니다.” 소은은 그가 가리킨 부분을 읽었다. 제 7조. 계약 기간 중 어느 한쪽도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느껴서는 안 되며, 이를 어길 시 계약은 즉시 무효로 한다. “이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이건 계약이지 진짜 연애가 아니에요. 감정이 섞이는 순간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선을 그어두는 겁니다.” 소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도현을 바라보았다. 진심이 되지 말라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는 사람이라니,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자신 있으신가 봐요. 저한테 반할까 봐 미리 방어하시는 건가요?”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도현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제 걱정보다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끝내자는 취지입니다. 계약이 끝나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거죠.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소은은 잠시 침묵했다. 아버지의 병원비, 카페 임대 문제, 그리고 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제안. 이성적으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불편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이틀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은 곤란합니다. 저도 빨리 정리해야 할 일이라서.” 도현은 계약서를 다시 봉투에 넣어 소은에게 건넸다. “검토해보시고 연락 주세요. 참고로, 이 제안을 거절하셔도 카페 임대 건은 제가 최대한 편의를 봐드릴 생각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별개의 제안이니까요.” 뜻밖의 말에 소은은 도현을 다시 보았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배려를 보이는 걸 보면 완전히 이해타산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저는 그냥…… 대표님 옷에 커피나 쏟은 사람인데.” 도현은 잠시 소은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어제와 오늘,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 그쪽이 제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다들 제 눈치만 보거든요.” 소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라운지를 나선 후, 소은은 계약서가 든 봉투를 품에 안고 한참을 걸었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추운 줄도 몰랐다. 병원에 들러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밀린 병원비 고지서를 떠올리고, 텅 빈 카페의 미래를 생각했다. 집에 돌아온 소은은 책상에 앉아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조항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7조에 머물렀다. ‘진심이 되지 말 것이라……’ 우습게도 그 조항을 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부터 선이 그어져 있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을 터였다. 예전에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소은에게는, 오히려 이런 계약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래, 어차피 마음 줄 일도 없을 텐데.” 소은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계약서 마지막 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서명란이 텅 빈 채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은은 병원에 들러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수술 얘기를 꺼냈고, 예상보다 훨씬 큰 금액이 언급되었다. 병실을 나서는 소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카페로 돌아온 그녀는 텅 빈 매장을 둘러보았다. 낡은 의자와 테이블, 손때 묻은 메뉴판까지, 이 모든 걸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소은은 결심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도현이 전화를 받았다. “결정하셨습니까?” “네. 계약하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일 오후에 계약서에 서명하러 오시죠. 그리고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자면.” “뭔데요?” “이번 주말에 첫 공식 일정이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여시는 자선 행사인데, 거기 파트너로 동행해주셔야 합니다.” 소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될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준비할게요.” 전화를 끊은 소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절대 진심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 하나만 지키면 되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약속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약속이 앞으로 얼마나 자주 흔들리게 될지를. 그날 저녁, 소은은 잠들기 전 계약서 사본을 다시 꺼내 읽었다. 형광등 아래서 글자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다 보니, 문득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재벌 3세와의 계약 연애라니,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친구 은정에게 이 얘기를 털어놓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계약서에는 비밀 유지 조항도 명시되어 있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운 지인에게도 계약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소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 병원비를 대신 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정작 아버지께도 솔직히 말할 수 없다니, 이 계약은 시작부터 거짓말투성이였다. 휴대폰 화면에는 도현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주말 자선 행사에 대한 간단한 안내와 함께, 드레스 코드를 지정한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소은은 링크를 눌러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한 벌에 몇백만 원은 우습게 넘는 드레스들이 화면을 채웠다. ‘이런 옷을 내가 어떻게 입어……’ 메시지 창을 닫으려는 순간,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다. [의상은 저희 쪽에서 준비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스타일리스트가 방문할 예정이니 참고하세요.]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문체였지만, 소은은 그 안에서 묘한 배려를 느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부담까지 떠넘기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소은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답장을 보내고 나서야 소은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이 계약을 감당할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하고, 진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할 수 없었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창밖으로 늦은 밤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소은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정식으로 서명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라서게 될 터였다. 잠들기 직전, 문득 라운지에서 보았던 도현의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계산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순간의 표정만큼은 진짜처럼 보였던 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 그것도 다 계산된 거겠지.’ 소은은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작은 의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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