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재수 없는 첫 만남
2026. 7. 15. · 👁 5
카페 안은 오후 세 시의 나른한 햇살로 가득했다. 한소은은 카운터 뒤에서 원두를 갈며 창밖을 흘끗 바라보았다. 골목 안쪽에 자리한 작은 카페 '소은'은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단골들 덕분에 그럭저럭 버텨오고 있었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될 줄 알았다. "사장님, 저 먼저 갈게요!" 아르바이트생 지수가 앞치마를 벗으며 인사했다. 소은은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는 다시 원두 봉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매출이 부쩍 줄었다. 건물주가 바뀐다는 소문이 돈 뒤로 임대료 인상 걱정에 밤잠을 설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아버지 병원비도 밀렸는데……." 한숨을 삼키며 원두를 그라인더에 붓는 순간, 카페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고개를 들지도 않고 습관처럼 인사를 건넨 소은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큰 키에 슈트를 완벽하게 소화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통화 중인 듯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계약은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예, 오늘 안으로 다시 보고서 올리세요." 남자는 전화를 끊으며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큰 키 때문인지 좁은 카페가 순간 더 좁게 느껴졌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얼음은 빼고, 뜨겁게."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소은은 별다른 감흥 없이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또 다른 전화가 걸려온 모양이었다. 남자가 스마트폰을 받으려 몸을 돌리는 순간, 소은이 막 완성한 커피잔을 트레이 위에 올리려던 손과 정확히 부딪혔다. "어, 어어—!"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그대로 남자의 셔츠와 재킷 앞자락에 쏟아졌다. "아!" 남자의 낮은 신음이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소은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뜨거우셨죠?" 허둥지둥 행주를 집어 든 소은이 남자의 옷을 닦으려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칫했다. 이건 좀 아닌가 싶어서였다. 남자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재킷을 벗어 살폈다. 짙은 남색 재킷에 커피 얼룩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이거 압니까? 오늘 미팅이 있어서 급하게 나온 건데." "정말 죄송해요. 세탁비는 제가 다 보상해 드릴게요.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화상은……." "화상까지는 아니고." 남자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이목구비가 반듯한 게 눈에 띄었다. 소은은 애써 그 생각을 지우며 냉장고에서 찬 물티슈를 꺼내 건넸다. "이걸로라도 좀 닦으세요." 남자는 말없이 물티슈를 받아 옷을 대충 닦아냈다. 여전히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뭐라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소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명함 지갑을 꺼냈다. "세탁비 청구할 테니까 연락처 남기세요." "네? 아, 네……." 소은은 얼떨결에 카페 명함을 건넸다. 남자는 명함을 흘끗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소은'? 사장 이름이 소은인가 보죠." "네, 접니다. 한소은이라고 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명함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카운터에 얼룩진 재킷을 걸쳐 놓은 채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커피는 다시 안 시킬 테니까, 그만 가보겠습니다." "저, 성함이라도……." "필요 없을 겁니다." 남자는 짧게 대꾸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 것 같았다. 소은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카운터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저 사람……."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오늘 하루 매출도 시원찮은데 커피값 하나 못 받고, 도리어 세탁비를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소은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저녁, 소은은 마감 정산을 하다가 우편함에서 낯선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건물 관리사무소에서 보낸 것이었다. 봉투를 열어본 순간, 소은의 표정이 굳었다. [건물 소유주 변경 안내 — 신규 임대차 계약 협의 요망] 새로운 건물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도현. 낮에 명함 지갑에서 언뜻 보였던 그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소은의 가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이도현이라니……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소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음 날, 카페 문을 연 순간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어제 그 남자였다. 이번엔 명함을 내밀며 정중하게, 그러나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시 인사드리죠. 건물주 이도현입니다. 임대차 계약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소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얽힐 운명이었다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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