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강호는 지옥
2026. 7. 15. · 👁 4
산 아래 첫 마을은, 무진이 기억하던 강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국숫집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고, 상인들이 목청껏 손님을 불렀다. 갓 구운 호떡 냄새, 대장간의 쇳소리, 아낙들의 웃음소리. 십 년을 짐승처럼 산 무진에게, 그 모든 것은 낯설고도 아득했다. 한때는 자신에게도 이런 일상이 있었다. 사형들과 장난치고, 주방 아저씨의 만두를 훔쳐 먹던, 그런 날들이.
무진은 낡은 삿갓을 눌러써 무면을 가린 채, 거리 한복판을 천천히 걸었다. 감상에 젖을 새는 없었다. 이 평화로운 거리 아래에도, 강호의 더러운 이빨은 어김없이 박혀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거리 끝에서 비명이 터졌다.
"제발! 이번 달은… 이번 달만은 봐주십시오!"
한 늙은 상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앞에는 푸른 무복을 걸친 사내 넷이 거들먹거리며 서 있었다. 가슴팍에는 검 두 자루가 교차된 문양― 청검문(靑劍門). 이 일대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정파 문파였다.
"봐줘? 우리 청검문이 이 마을을 지켜주는데, 보호비를 안 내겠다고?"
무사 하나가 상인의 좌판을 발로 걷어찼다. 애써 쌓아 올린 과일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정파 무사에게 대들었다간 어떤 꼴을 당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우리가 없으면 이 마을은 산적들한테 벌써 결딴났어. 그 은혜도 모르고, 이 늙은이가."
"하지만 지난달에 아들이 병으로… 약값이…"
"시끄럽다!"
무사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상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손이 떨어지면, 늙은 몸이 성치 못할 터였다.
무진은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십 년 전, 그는 정확히 같은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정의를 외치며 힘없는 자를 내려치던 손. 그 손은 그날 밤, 어린아이의 목까지 서슴없이 베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것을 정의라 불렀고, 훈장까지 내렸다.
무진의 발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서두르지 마라.' 사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눈앞의 이 일만큼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던 어린 자신처럼, 저 늙은 상인을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손 놓지."
어느새 무진이, 그 무사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뭐야, 이 거지 같은 놈은?"
무사가 인상을 썼다. 삿갓에 다 해진 옷. 어디서 굴러먹다 온 촌뜨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목을 뿌리치려 힘을 주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힘을 줘도, 잡힌 손목이 바위에 물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등줄기로 서늘한 것이 스쳤다.
"이 새끼가! 뭘 하는 거야, 다들!"
나머지 셋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검날이 무진을 향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무진은 상인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삿갓 아래로, 나직이 말했다.
"정파라."
"뭐?"
"백성을 지킨다는 자들이, 백성을 뜯어먹고 있군. …십 년 전에도, 딱 이런 놈들이었지."
십 년 전 그날 밤, 정의를 외치며 아이들까지 베던 자들. 지금 눈앞의 이자들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가장 앞선 무사가 코웃음을 치며 검을 내질렀다. 빨랐다. 명색이 청검문의 무사였다.
하지만 무진의 눈에는, 굼벵이가 기어오는 것처럼 느릿하게만 보였다.
무진의 손이 움직였다.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저 손날로 검신을 툭, 쳤을 뿐이다.
쩌엉―!
맑은 쇳소리와 함께 무사의 검이 두 동강 나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무진의 손바닥이 사내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커헉!"
무사는 짚단처럼 날아가 국숫집 벽에 처박혔다. 단 한 번에 정신을 잃었다.
내공을 흐르게 하는 법은 몰랐다. 하지만 쌓기만 한 그 힘은, 이런 하찮은 것들을 상대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짐승을 상대하던 손속을, 사람에게 처음 쓰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무진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들은 지켜야 할 백성이 아니라, 백성을 뜯어먹는 승냥이였으니까.
남은 셋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괴, 괴물이다…!"
그들은 검을 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쓰러진 동료를 챙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거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넋을 잃은 채 무진을 바라보았다. 늙은 상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 대협…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이 은혜를…"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흙바닥에 떨어진 과일 하나를 주워 상인의 손에 쥐여 주고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이, 이름이라도… 얼굴이라도 좀 뵙게 해주시오!"
무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삿갓 아래 새하얀 무면만이, 잠깐 사람들의 눈에 스쳤을 뿐이었다.
거리를 벗어나는 무진의 등 뒤로, 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예닐곱쯤 되었을까. 아이는 무진을 올려다보며, 흙 묻은 손으로 조약돌 하나를 내밀었다.
"아저씨, 이거. 고마워요."
무진은 잠시 그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면 아래, 그의 표정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조약돌을 받아 들고,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다시 돌아섰다.
십 년 전, 사부는 늘 말했다. 천마신교가 마교(魔敎)라 불리는 것은, 그 힘을 두려워한 자들이 멋대로 붙인 이름일 뿐이라고. 정작 이 땅의 힘없는 백성을 지킨 것은 자신들이었노라고. 어린 무진은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그 아이의 눈빛을 보고서야, 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지옥 같은 길을 걷는지를.
복수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저 웃는 얼굴들을, 저 평범한 하루들을 짓밟고도 정의를 참칭하는 자들. 무진은 그런 자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사부가 지키려 했던 것을 짓밟은 자들이었으니까.
그날 저녁, 저잣거리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검객이 나타나, 검도 뽑지 않고 청검문의 무사들을 쓸어버렸다고. 삿갓 아래 새하얀 가면을 쓴,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검객이라고.
그 이름 없는 소문은 밤바람을 타고, 강호 곳곳으로 빠르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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